깡데렐라 2022. 1. 3. 04:54

'잘 생각해라, 알타이르 크레이튼. 이번이 마지막 기회야.'

 얼음보단 차라리 쇳덩이 같은 목소리가 인두로 지진 듯 알타이르의 귓가에 붙어 맴돌았다. 평소 같았다면 특유의 호기와 반항심으로 넘겼을 텐데, 이번만큼은 달랐다. 목소리는 점점 무겁고 차가워지며, 가느다란 밧줄 혹은 배곯은 짐승으로 변하여 알타이르의 정신을 꿰어 묶고 좀먹었다. 물어뜯기는 환상통에 휩싸여서는 퍼뜩, 두 눈을 떴다. 잠깐 눈만 붙이려 했는데, 어느새 시간이 꽤 흘렀는지 노을이 하늘 곳곳을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

 무너진 건물 잔해 속, 천장이자 바닥인 것들이 차마 다 깔아뭉개지 못한 기둥 밑 좁은 공간에 우리는 웅크리고 앉아있었다. 우리라 함은, 그의 곁에 한 사람이 더 있다는 뜻이다.

 "로라?" 잠긴 목소리로 부르면, 알타이르의 목소리가 벽을 타고 울렸다. 대답이 돌아오지 않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누군가 이곳을 눈치챘다 해도 둘 다가 아닌 하나만 끌고 갈 이유는 없다는 걸 아는데도 확인은 불가피했다. 어렵지 않다. 기둥 뒤로 조금만 돌아가면, 그래. 이렇게 잠든 그녀의 얼굴이 보이질 않나.

 로라는 옅은 속눈썹을 가지런히 내리깔고 죽은 듯이 잠들어 있었다. 둘 중 누군가는 불침번을 서야 했지만 그녀를 탓하고 싶지는 않았다. 로라의 수면시간은 아주 불규칙했고, 때로는 이틀을, 언제는 닷새를 잠들지 못해 시체처럼 걷다 주저앉은 날도 있었다. 오늘은 로라가 사흘 째 깨어있던 날이었으니 이렇게나마 잠에 든 것이 오히려 행운이었다.

 알타이르는 장갑을 하나 벗었다. 티 나지 않던, 검고 붉은 흙과 녹, 정체를 알 수 없는 것이 말라 후드득 떨어졌다. 드러난 맨손에도 적지 않은 상처와 흉터가 있었다. 더 이상 곱게 자란 도련님의 것이라고는 못할 손. 그 손을 뻗어, 로라의 코 아래 조심히 검지를 가져갔다. 새근새근, 따뜻한 숨이 피부 위의 잔 솜털을 간질였다. 알타이르는 순간 크게 코웃음 칠 뻔했다. 비웃음이 났다. 그 숨을 온전한 다행으로 여기지 못하는 스스로에게.


 일주일 전, 로라가 정찰을 나가는 동안 알타이르는 소형 라디오 채널을 이리저리 돌려보고 있었다. 쓸모없는 정보나 노이즈가 대부분이지만 간혹 수배 정보나 봉쇄구역, 정부와 군에 대한 소식도 들려오곤 했다. 덕분에 간신히 수색을 피한 적도 있으니 이제 어떻게든 건전지를 구해 라디오를 체크하는 게 버릇이 되었더랬다.

 그리고 마법처럼, 저주처럼, 어떤 주파수가 하나 걸려들었다. 노이즈 섞인 목소리는 언뜻 기계음처럼 들렸으나, 알타이르는 단박에 그 목소리가 누구의 것인지 알았다. 아버지. 군 체제를 직접 설계하고, 그 정점에 서 있는 총사령관. 심혈을 기울여 찾지 않는다면 듣지 못할 방송이, 로라가 곁에 없는 순간 오로지 알타이르에게로 폭격했다.

 내용이란 단순했다. 하지만 언제나 그렇듯 단순하다는 게 별 거 아니란 뜻은 아니었다. 작은 별을 확보했다. 원한다면 돌아와. 쌍둥이자리를 들고. 싯구처럼, 소설의 한 문장처럼 이어진 목소리에는 고저가 없었다. 혹시나 누가 듣더라도 관심 한 자락 두지 않을 문장 속에 든 암호를, 당연하게도 알타이르는 모두 해석할 수 있었다.

 거짓말. 그것이 첫 번째 감상. 스피카를 군에서 확보했다니, 말도 안 된다. 그야, 미리 스피카를 빼돌려 보호하고 있는 트리스탄에게서는 아무 연락이 없었다. 무슨 일이 생겼다면 분명 어떻게든 제게 신호를 보냈을 것이다. 그러나 곧 알타이르는 가장 끔찍한 망상에 사로잡혔다. 혹시 그럴 틈도 없이 스피카가 납치되고 트리스탄이 구금되었다면? 알타이르가 아는 총사령관은 농담이나 허풍이 통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가 스피카를 갖지 못했다면 이렇게 허술한 함정을 팔 리가 없었다. 이런 생각의 흐름부터가 위험하다는 걸 자각하고 있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무려 스피카의 일이다. 제가 가장 사랑하는, 작고 여린 여동생.

 굳이 '원한다면'이라는 단어를 끼워 넣은 것도 악취미다. 알타이르는 언제나 스피카를, 스피카의 안전을, 스피카의 행복을 원했다. 조건이 아니라 협박이다. 돌아가지 않으면 더 이상 원하는 것조차 하지 못하게 될 거라는. 위안받기 위해 불확실성을 더듬었지만, 그럴수록 숨이 막혔다. 내내 죽이고 또 죽여온 불안이 기름을 끼얹은 듯 타올랐다. 만에 하나, 그 작은 가능성이 알타이르를 혼란하게 했다.

 불행 중 다행인 점도 분명 있었다. 알타이르는 군부대로 돌아간들 죽지 않는다. 현재 수배된 것은 눈앞의 여자뿐이다. 알타이르가 로라와 함께 있다는 사실은 극비였고, 로라는 혼자 대륙을 전전하며 도주 중…이라는 게 대외적으로 알려진 사실이었다. 알타이르 베텔기우스 크레이튼, 재앙과 전투 중 중상. '최전선에서 공을 세우고 치료와 재활을 병행 중인 명예로운 군인'이 바로 알타이르였다. 그러니 오히려 훈장을 받고 높은 지위에 오를 확률이 높았다. 단번에 대위를 뛰어넘어 소령을 달 수도 있을 것이다. 총사령관은 결코 제 아들이 재앙을 데리고 도망친 탈영범이라는 리스크를 지려 하지 않았다. 알타이르는 저 자신을 비웃으면서도 감히 확언했다. 그런 현실에 조금이라도 안심해본 적 없노라고. 권력에 취해 나 스스로를 놓은 순간이 단 한 번도 없다고. 관용을 닮은 그것이 족쇄라는 걸 모를 정도로 어리석지 않았다.

 하지만, 로라는? 로라는 죽는다. 인간 취급도 받지 못하며, 실험체가 되어 정부가 시행 중인 온갖 연구에 기여하고는 처형당할 것이다. 더 덧붙일 말도 없이, 그것이 재앙의 최후다.





 로라의 탄생이 곧 재앙의 탄생은 아니었다. 알타이르가 태어난 해, 위험구역에서 생김새가 똑같은 일란성쌍둥이가 태어났을 뿐이다. 멸망이 시작된 것은 그보다 더 전이었고.

 멸망이라는 탄환을 쏘아 올린 건, 여느 때처럼 평범한 낮에 발생한 일식이었다. 관측한 바에 따르면 달이 해를 가린 것도 아니었다. 검은 원 주위로 타오르던 금환이 불길하게 일렁였다. 전 세계가 어둠에 잠긴 채 속수무책으로 며칠이 지났다. 그리고, 활의 시위가 당겨지듯 천천히, 어둠이 물러났다. 드러난 태양, 다시금 따스하게 달아오르는 공기. 그에 모두가 안도의 한숨을 쉬던 찰나… 쇄도하는 화살처럼, 영국 런던을 중심으로 듣도 보도 못한 짐승들이 바다, 강, 숲 속에서 쏟아져내렸다. 세계가 뒤집혔다. 우리가 알던 식물, 동물은 전부 알 수 없는 생물로 변했다. 그들이 흩뿌리는 숨은 인간에게 독이며, 먹잇감을 찢어발긴 후 배설하는 것은 땅을 썩혔다. 인류의 터전은 날이 갈수록 좁아지기만 했다.

 땅 위 모든 국가가 전시체제에 돌입했다. 실체화된 자연과의 전쟁은 사람들을 공포로 밀어 넣었다. 변이 된 짐승과 식물의 숨통을 끊으려, 타국을 침략하고 약탈하려 온갖 무기들이 사용되었다. 땅은 더욱 빠르게 황폐화되고, 추산할 수도 없는 인명피해가 발생했다. 슬픔에 잠겨있을 시간도 없었다. 국가가 도시 규모로, 마을 규모로 축소되었다. 그제야 인류는 국경을 지웠다. 물가와 산지, 숲지대는 죄다 봉쇄구역으로 지정되었다. 그 외에도 변이체가 나타나는 곳, 썩은 땅, 독기가 퍼진 지역, 때맞춰 창궐한 전염병이나 방사능에 오염된 곳은 모두 폐쇄되거나 위험지역으로 설정되었다. 물자를 모으고, 식량을 확보하고, 정화시설을 구축하고, 화폐의 가치를 새로 정립했다. 연합군의 체계가 개편되고 새로이 특수부대가 여럿 조직되었다. 알량한 평화를 위해, 그 과정에 함께한 붕괴는 기록되지 않았다. 인류의 멸망이 바깥으로부터 웅크리는지, 안으로부터 기지개 켜는지 알 수 없는 세월이 흘렀다.

 그리고 작은 기적이 일어났다. 간간이 변이체가 점심거리를 찾으려 산책하는 위험구역에서 헤이든 부부가 쌍둥이 딸을 낳은 것이다. 누구나 알겠지만, 아포칼립스에 신생아 둘을 키워내는 건 상상 이상으로 힘겨운 일이다. 하루 종일 이를 악무느라 헤이든 부부의 어금니가 다 닳아버릴 정도로 지난한 시간이었다. 희생된 부부의 삶과 땀과 눈물이 낳은 것은 무엇이었을까.

 서로의 손을 붙잡고 어떻게든 자라난 쌍둥이가 열일곱이 되던 해, 기이한 일이 생겼다. 쌍둥이 중 언니인 로렌의 발자국마다 흰 빛이 피어올랐다. 동생인 로라는 맨손으로 들개 형상의 변이체를 찢어 죽였다. 어떻게?라는 물음은 의미가 없었다. 로렌이 밟는 땅에 양분이 돌고, 내쉬는 숨이 공기에 섞이면 오염수치가 현저히 낮아졌다. 검은 침을 뚝뚝 흘리는 변이체들은 로라만 마주하면 순식간에 공격성을 잃었다. 멀쩡한 식물이 자라나고, 깨끗한 물이 흐르고그래, 그건 기적이었다. 쌍둥이자리의 기적.

 당장 로렌은 연합정부의 연구소 소속이, 로라는 연합군 소속이 되었다. 로렌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해도 재차 오염되는 속도를 감당하기 어려워, 정부는 변이체를 먼저 처리하기로 했다. 쌍둥이는 영웅이 되었다. 명예로운 이름도 하사 받았다. 폴룩스와 카스토르. 하나도 아닌 둘이라 완전했다. 세상을 정화하자, 괴물을 말살하자! 흥분에 젖은 환호성이 연일 거리를 울렸다.

 알타이르는 로라와 같은 부대에 있었다. 로라가 태생적인 조건 덕에 승진계도를 밟을 때, 알타이르도 전형적인 엘리트 코스를 거쳐 그녀의 곁에 섰다. 같은 속도로 나아가는 두 사람은 어렵지 않게 우정을 쌓았다. 야산에서 부스스한 몰골로 일어나 퍼석거리는 전투식량을 씹었고, 밤하늘 아래 몰래 꿍쳐둔 초콜릿을 반 잘라 나눠먹으며 웃었다. 탈인간적인 로라와 평균을 훨씬 웃도는 지휘, 전투능력을 가진 알타이르가 전장에서 뿜어내는 박력은 엄청났다. 알타이르와 로라는 함께 공을 쌓고, 같은 날 중위로 승급했다. 아무 말 없이 서로의 어깨를 힘껏 끌어안은 그날을 절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누구보다 많은 피를 손에 묻힌 둘은 자주 별자리를 이으며 미래를 그렸다. 우리가 세상을 구원하는 거야. 세상을 깨끗이 청소하고 나면, 곧 전쟁과 살육 없는 시대가 도래할 거야.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행복한 삶을 살 거야.

 알타이르는 로라가 재앙이 된 날을 기억했다. 우글거리는 변이체 사이에, 세상과 유리된 듯 홀로 서 있던 그녀를. 그녀의 눈에 깃든 어둠을. 그녀를 숭배하듯 몸을 낮추고 길게 울어 젖히던 변이체들을. 혈관 곳곳에 파고드는 독소처럼 숨통을 틀어막던 검은 안개를. 로라는 울고 있었다. 슬픔이 아닌 뜨거운 분노가 끊임없이 로라의 뺨을 타고 흘렀다. 알타이르는 본능적으로 로라가 '국가기밀'을 알게 되었다고 확신했다. 소리를 하나하나 혀 위로 굴려 모아 가까스로 그녀의 이름을 부르려는 순간, 그 평원에 알타이르와 로라를 제외하고 숨 쉬는 '인간'은 아무도 없었다.

 알타이르는 한 중대를 말살한 로라를 체포하는 대신 안고 달아나기를 택했다. 로라와 함께한 모든 세월이 발목을 붙들었는지, 어렴풋 로렌이 어떤 처지일지 예상했음에도 억측이라며 함구했던 일이 가슴을 옥죄었는지 알 수 없었다. 잊지 않고 스피카의 신변의 안전을 우선 확보한 후, 망설임 하나 없이 떠났다. 알타이르는 로라가 처형되는 걸 가만 두고 볼 수 없었다. 그뿐이었다. 그뿐인 이유로 스스로를 멸망한 세상으로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큼 치기 어렸다. 두 사람은 위험구역을 전전했다. 로라 덕분에 변이체는 두 사람에게 위협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변이체가 가득 있는 곳에 베이스캠프를 차리면 수색대가 쉽게 진입할 수 없어 안전했다. 검고 진득한 타르를 연상시키는 변이체들이 온순히 로라의 곁을 지키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형용할 수 없는 기묘함에 휩싸이기도 했다.

 잠을 놓은 로라를 억지로 기절시키거나 곡기를 끊은 로라의 식도로 뭐라도 밀어 넣는 건 모두 알타이르의 몫이었다. 끈 떨어진 마리오네트처럼 넋을 놓았던 로라는 어느새 하루 중 잠깐이나마 제 힘으로 걸었고, 제 의지로 먹었고, 피곤에 절어서라도 잠에 들었다. 알타이르의 손이 가는 것보다 로라가 혼자 해내는 시간이 점점 늘어났다. 알타이르는 간혹 자신이 로라를 통해 무엇을 충족하고 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졌지만 답을 돌려주는 이는 없었다. 다만 알타이르 크레이튼이란 진실로 이기적인 인간이라며, 마른 얼굴을 거칠게 쓸어내렸다.





 언제 눈을 뜬 건지, 로라가 알타이르를 응시하고 있었다. 혼몽한 분홍 눈이 두어 번 깜박이다 빛을 찾았다. 알타이르? 지금 몇 시야? 버석하게 갈라진 목소리가 속삭이듯 흘러나왔다. 그 작은 움직임에 마른 입술이 찢어지며 피가 터졌다. 잎맥처럼 번지는 붉은빛에 가슴께가 선득했다. 조심히 닦아주면 따가운지 로라의 뺨이 움찔 튀었다. 다섯 시 사십 분. 나직하게 대답해주니 고개를 끄덕인다. 그 모습이 꼭 망가지기 직전의 목각인형 같았다.

 가방에서 은박에 싸인 초콜릿을 꺼내 네모난 선을 따라 조심히 꺾었다. 두 조각씩이 오늘의 저녁이다. 두 사람은 겨우 초콜릿 두 조각을 20분 동안 녹여먹었다. 기둥에 묶어둔 짐을 챙긴 후 자리에서 일어나는 로라를 부축해주었는데, 그녀의 후들거리는 다리가 제대로 서지 못했다. 다리며 발목에 모두 힘이 풀린 게 분명했다. 군화를 벗겨 살펴보니 아니나 다를까 발목이 퉁퉁 부어있었다. 알타이르는 익숙하게 몸을 숙여 등을 보였고, 로라는 괜한 실랑이 없이 업혔다. 가벼운 무게가 어깨에 묻어나면 이내 마른 팔이 알타이르의 목을 감싸 왔다. 잠시 넋을 놓으면 시체를 업었다고 착각할까, 알타이르는 정신을 곤두세웠다.

 한 사람의 걸음, 두 사람의 숨, 한 덩이의 그림자가 길게 늘어졌다. 둘은 대체로 정처 없이 걸었다. 알타이르는 걸으면서 중간중간 목이 마르진 않으냐, 발목의 통증은 줄었나, 불편하면 참지 말고 말해라 따위의 말을 건넸다. 그때마다 로라는 고개를 젓거나, 끄덕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그 사이 하늘은 완전히 어두운 남색으로 물들었다. 매연 없이 맑은 밤하늘에 소금 같은 별이 총총 흩뿌려져 있었다. 알타이르는 습관적으로 길잡이 별을 찾았다. 맞는 길을 걷고 있었다는 걸 확인했고, 로라를 다시 추켜 업으며 이를 악물었다. 둘은 대체로 정처 없이 걷지만, 지금 알타이르에게는 목적지가 있었다.

 "왜?"

 로라가 갑작스레 알타이르의 전투복 옷깃 안으로 손가락을 밀어 넣길래 물었다. 의문은 금방 해소되었다. 달빛에도 희뿌옇게 빛나는 군번줄을 꺼낸 것이다. 심지어는 연결고리를 풀어내기까지 했다. 그래도 질문을 철회하지는 않았다. 갑자기 내 군번줄은 왜. 그렇게 다시 묻는 대신이었다.

 "… 겨울이라, 하늘에서는 못 찾겠어서."

 알타이르는 기민하게 그 대답의 의미를 파악해냈다. 등에서 작은 움직임이 느껴지나 싶었더니, 로라도 고개를 들고 하늘을 더듬은 모양이었다. 여름철 별자리인 알타이르를 겨울에 정수리 위에서 볼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로라의 흰 손끝이 Altair라고 양각된 부분을 끈질기게 매만졌다. 시야 끝에 걸리는 폴룩스를 찾아내고야 만 알타이르는 시선을 정면으로 내리고, 어느새 멈춘 걸음을 다시 옮겼다.

 "눈앞에 있는데 왜 하늘에서 찾아."
 "너도 찾고 싶잖아."
 "뭘."

 로라는 답하지 않았다. 대신 군번줄을 다시 알타이르의 목에 걸어, 옷 안으로 넣어주었다. 밤공기에 닿아 차갑게 식었을 거라 생각한 알타이르를 비웃듯 군번줄은 미지근하고 축축했다. 그때부터 로라는 알타이르의 등에서 내려, 그의 곁에 나란히 걸었다.

 알타이르가 로라를 이끌고 걸음을 멈춘 곳은 어떤 고원지대였다. 하늘이 탁 트이고, 그 아래로는 너른 평야가 펼쳐져있었다. 알타이르가 평소 선호하는 형태의 베이스캠프는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것이 헬기가 뜨면 감시망을 피할 수 없는 데다, 추격전이 벌어질 때 숨을 곳도, 총알이나 폭탄이 쏟아질 때 몸을 보호할 엄폐물도 없기 때문이다. 지평선에서부터 무한히 이어진 밤하늘이 불투명해, 둘은 마치 거대한 돔 안에 갇힌 것만 같았다. 로라는 불만 갖지 않았다. 흰 입김이 알타이르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와 구조신호처럼 위로 퍼져나갔다.

 일단, 스피카의 행방과 안전을 확인하자. 로라가 즉결처형당할 확률은 제로에 가깝다. 아니, 로라가 없으면 변이체를 감당할 수 없을 테니 확실히 제로다. 아버지의 비위를 맞추는 척하면서 기회를 노리고, 두려움을 이겨내고, 머리를 굴려서, 로라를 다시 빼내자. 쉽지 않은 일이 되겠지만 권력은 모든 걸 가능하게 한다. 그때가 오면 로라가 목숨처럼 소중히 여기는 로렌도 함께 빼돌리는 거다. 알타이르는 차갑게 식은 머리로 쉴 새 없이 생각했다. 김이 머리가 아니라 입에서 나는 게 다행일 정도로.

 타, 타, 타, 타-
 저 멀리 하늘에서 붉고 노란 별이 굼뜨게 움직였는데, 가까워질수록 속도가 빨라졌다. 메트로놈처럼 일정한 프로펠러 소리가 적막한 밤하늘을 갈랐다. 먼지투성이가 되어 크림색이 아니라 회색이 되어버린 알타이르의 머리카락이 인공적인 돌풍에 하염없이 흩날렸다. 헬기 아래로 쏘아진 빛기둥이 정확히 알타이르가 선 곳을 가리켜, 밤인데도 대낮처럼 밝아졌다.

 알타이르는 묘한 위화감을 느꼈다. 헬기의 프로펠러 소리가 귀를 찢는 가운데에서도 너무나도 조용했던 탓이다. 그러니까─ 등 뒤가…. 알타이르는 유령 같은 낯을 하고 천천히 뒤로 돌았다. 알타이르의 치기와 오기와 욕심이 남긴 것은 무엇이었을까.

 텅 비어있었다.
 로라 헤이든이, 그곳에 없었다. 알타이르는 두 발로 땅을 딛고 서있기 위해 부단히 노력해야 했다.

 평평한 땅 위로 헬기가 다 내려앉기도 전에 무장군인 두 명이 절제된 동작으로 뛰어내려 소총으로 알타이르를 겨눴다. 붉은 점이 알타이르의 이마와 가슴에 닿았다. 알타이르는 그들이 방아쇠를 당길지 말지 전혀 궁금하지 않았다. 그저, 누군가 있었던 흔적조차 없는, 심지어는 발자국조차 하나가 되어버린 흙바닥을 멍하니 응시했다.

 헬리콥터가 완전히 착륙하자 그 안에서 제복을 입은 누군가가 헤드셋을 벗어던지고 성큼성큼 알타이르에게로 다가왔다. 그의 계급장이 밝은 빛을 반사하며 빛나는 바람에 알타이르는 눈살을 찌푸려야 했다.

 "왜 혼자 있지?"

 총사령관이 물었다. 알타이르는 대답할 수 없었다. 그러자 두껍고 투박한 손이 알타이르의 멱살을 틀어쥐었다. 왜 혼자 있냐고 물었다. 대답해. 납덩이같은 목소리와 함께 투둑, 무언가 끊기는 느낌이 났다. 알타이르는 그것이 자신의 이성이거나 영혼일 거라고 생각했다.

 총사령관의 생각은 달랐던 모양이다. 가늘고 희던 손가락과는 다르게 우악스러운 손길이 알타이르의 옷깃을 뜯었다. 그 사이로 무언가가 주르륵 흘러내리며 빛을 반사해 또 알타이르의 눈을 찔렀다. 알타이르는 겨우 그것이 무엇인지 떠올렸다. 로라가 풀었다가 다시 걸어준 군번줄이다.

 새삼 제 아들이 맞나 확인하는 건지, 총사령관은 끊긴 군번줄을 꺼내 유심히 바라보았다. 알타이르는 다시 어떤 위화감을 느꼈다. 내 군번줄이 저렇게 낡았던가. 저렇게 피투성이였던가. 모서리가 날카로웠던가. 쿵. 쿵. 쿵. 심장이 거칠게 뛰었다. 그럴 리가 없다, 로라 헤이든이….

 "… 죽였군. 무정한 건지, 나약한 건지."

 총사령관이 혀를 찼다. 벼락같은 깨달음이 알타이르의 정수리에 내리 꽂혔다. 얼음물이 끼얹힌 것처럼 온몸이 차게 식었다. 로라 헤이든이 다 알고 있었다. 언제부터였을까. 일주일 전, 어제, 오늘, 초콜릿을 나눠먹을 때, 등에 업힐 때, 고개를 끄덕일 때, 별을 찾을 때, 군번줄을 매만질 때 그때다. 로라 헤이든과 알타이르 크레이튼의 군번줄이 뒤바뀐 건. 로라는 제 군번줄을 미리 풀어 손아귀에 쥐고 있었을 테고, 어떻게든 핑계를 찾아내어 알타이르의 군번줄을 풀었다. 정면을 보고 있는 알타이르는 누구의 군번줄이 제 목에 걸리는지 눈치채지 못했다. 로라가 태연자약한 얼굴로 스스로의 유품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이 고원에 발 딛는 순간, 둘만의 세계를 무언가 찢고 들어온 순간 로라는 사라졌다. 알타이르를 버리고. 알타이르는 그녀의 수많은 작별인사 중 단 하나도 알아듣지 못했다. 


 이대로 헬기를 타고 돌아가면 영웅이 될 것이다. 부상병 알타이르는 연막이 되어 사라지고, 실은 재앙을 암살하기 위해 비밀리에 파견된 특수부대 팀장만 남을 것이다. 소령이 다 무언가. 그에겐 창창한 내일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정부 인사들과 연구소장은 재앙을 연구재료로 사용하지 못한 점에 심히 유감을 표하며 은근히 알타이르를 압박하겠지만, 그도 잠깐일 거다. 변이체가 창궐하는 이상 권력을 보장받는 장군들이 알타이르에게 번쩍번쩍 빛나는 훈장을 서너 개는 더 달아줄 테니까. 대중들은 환호할 것이다. 재앙이 죽었다. 빛이 우리를 구원하리라.

 인정해야 했다. 언제나 둘이어서, 로라도 하나로서 완전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했다. 실책이 뼈아팠다. 알타이르는 천천히 한 손을 들어 손바닥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도 손도, 거칠게 말라있었다. 로라 헤이든도 처절하고 지독하게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소재 출처: VINE 커미션 @cm_v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