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깡데렐라 2023. 1. 9. 14:26

너는, 나를 어쩔 셈이야.

 

그 짧은 문장 하나를 묻지 못한 채, 쌀쌀한 봄, 짭조름한 여름, 버석한 가을과 그럼에도 따스한 겨울이 네 번, 거기에 두 번을 더해 총 여섯 해를 스쳐보냈다.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다. 반드시 이별할 것치곤 길었고, 내 인생에 다시 없을 사치라 하면 짧았다. 물 위에 누운 것처럼 부드럽고 폭신한 침구, 산홋빛 캐노피, 아침저녁을 가리지 않고 호화로운 음식과 따스한 목욕물, 서재를 가득 채운 책들, 먼지 한 톨 없는 대리석 복도 벽에 커다랗게 걸린 너의 초상화…….

 

처음 그의 초상화를 그릴 적에는 철없게도 생각했다.

어린 영애들이 그를 사랑하지 못해 안달이겠구나. 깎아지른 절벽과 풍파를 닮아 그리 여겼다. 별 잃고 길 잃은 망망대해가 붉은 눈 안에 출렁였고, 봄이 없어 칼바람같은 허무함과 냉랭함이 있었다. 무릇 사춘기를 간신히 넘긴 영애들은 그런 위험함을 사랑하기 마련이기에. 게다가 마침 그도 혼기에 들어섰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던 터라. 혼담이 수백 들어와 쌓이려나. 그렇게 사교 시즌에 정혼자라도 발표한다면 여인들의 울음소리가 그치지 않을테지. 시답잖은 사념. 그런 그에게 필요한 것 중에 사랑은 없다는 걸, 그래서 사랑해야만 한다는 걸 알게 된 건 초상화를 채 완성하기도 전이었다. 

그가 내민 계약서에 서명하는 과정은 순조로웠다. 코웃음 쳤을지도 모르겠다. 사랑? 하라면 못할 것도 없었다. 그리고 아이러니하게도, 하지 않을 자신 또한 있었다. 진실되게 사랑하되 절대 사랑하지 않을 것. 언뜻 모순으로 보이는 문장이 계약의 골자였고, 사랑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채, 삶을 지키기 위해 애쓰는 두 사람은 솜털같은 계약 속으로 몸을 구겨넣었다. 신분을 망각하고서 세기의 사랑에 빠진 자작과 한 여인. 돌아오는 봄에 열리는 성대한 결혼식. 원성과 반발, 그 장벽을 뛰어넘는 로맨스. 삼류 자작극. 

 

언제나 그렇듯 삼류이기에 통하는 것들이 있지 않은가.

아르체오의 모두가 열광하는 로맨스 속에서, 그는 간혹 어떤 안전장치도 없는 것 같았다. 언제나 여유롭고 무심했다. 지켜보는 나는 간단히 결론 내리곤 했다. 이 저택도, 크레이튼이라는 이름도 모두 그의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생활이 끝났을 때 그는 잃을 것이 나밖에 없다. 자작가의 주인, 사교계의 구심점, 재산이 막대하고 당당한 이름을 가진, 여동생을 사랑하는 알타이르 크레이튼. 그리고 누구도 사랑하지 않는, 어떤 그림도 당당하게 갤러리에 내걸 수 없는, 크레이튼이 아닌 헤이든의 로라만이 그 안에서 떨어져나온다. 계약서에 쓰인 '동등한 A와 B'라는 문구는 이렇게나 허망하지 않은가. 

추적의 손길이 스피카에게 가까워질 수록 자주 입술을 뜯고 빈번히 적막한 서재를 서성였다. 고민이 깊거나 불안할 때면 드러나는 습관이다. 나는 그와 달라서, 안전장치를 찾아 헤매었으니까. 오라비의 손을 놓친, 작은 별 같은 아이를 하나 오롯 연민하기에도 위태로운 처지니까. 현명한 처신이 무엇인지 생각해내야 했다. 그래야만 하는 삶이므로. 그러지 못하면 무너져야 하므로.

 

결론적으로, 나는 미련도 없는 것처럼 살기로 했다. 과거가 되어버릴 삶이라면 들어내버리는 게 나았다. 그래서 외출을 줄이고 초라한 옷을 입었다. 높지 않은 단화를 신었다. 간간이 누군가의 초상화를 그리고 삯을 받았다. 풍경화는 이름도 없이 좌판에 내놓으면 누군가가 사 갔다. 묵묵한 노력 끝에 모든 것이 계약 이전의 풍경과 같았다. 간혹 우체통에 들어있는 편지만 빼고.

 

밋밋한 인장. 발신인은 A. 익숙한 필체. 

뜯어보지 않아도 누가 보냈는지 알았다. 알타이르 크레이튼. 공기처럼 중얼거린 이름은 금세 흩어지고 만다. 언제나 그렇듯 가장 구석 서랍 속, 편지 더미 위에 하나를 더 얹는다. 이쯤되면 편지가 끊길 법도 하다고, 서랍을 닫으며 생각했던 것 같다.

예기치 않게 붙잡힌 날, 나는 얼굴 팔리지 않은 곳이 없는 탓에 풍성한 레이스가 붙은 모자를 쓰고 있었다. 얼굴을 반쯤 가리는 하얀 레이스 너머로 희고 붉은 것이 흐리게 들어찼다. 순간 터져 나오려는 물음을 삼켰더랬다. 왜 그런 얼굴이야. 대신 억눌린 숨을 내쉬었다. 굳게 선 그는 낯선 어투로 물어왔다. 편지를 보냈는데, 왜 답장이 없는 거지? 붙잡힌 것만큼이나 예기치 못한 물음에 금붕어처럼 입을 뻐끔대기만 했으나, 대답이 없어도 그의 말은 멈추지 않았다. 

"나는 우리가 꽤 괜찮은 비즈니스 파트너였다고 생각했는데, 앞으로도 연락 정도는 이어갈 수 있을 거라고 여긴 건 내 착각이었나."

많이 양보해도 그가 제정신 같진 않았다. 그가 나를 어떤 식으로 잘라낼지 상상한 수많은 가능성 안에 이런 상황은 없었다. 여긴 그늘도 없는 대로변이라고. 전 부인을 잊지 못한 크레이튼 자작으로서 데일리 에비뉴의 1면을 어여쁘게 장식할 셈인지. 차가운 이성이 고하는대로, 짐짓 냉랭하게 그의 손을 쳐냈다. 평소라면 영악하게 굴었을 그가 어째서 투정같은 걸 부렸는지, 그렇게나 안일한지 생각할 겨를은 없었다. 그저, 거친 빵조각을 잔뜩 목구멍에 쑤셔넣은 듯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왜 이래. 우리 약속했잖아, 이별하기로. 

 

그 결과, 그에게서 도망치듯 벗어난 나는 홀로 주저앉아있는 것이다. 뻑뻑하고 거친 재질의 침구, 햇살이 들이치는 얇은 커튼, 먹다 남은 감자 수프, 겨울은 아직인데도 얼음장같은 물, 먼지와 나무 거스러미가 잔뜩 일어난 마룻바닥과 빈 캔버스 사이에.

아아, 덧없어라. 우리에게 남은 것은 거짓이고, 오롯 진실한 것은 이별 뿐이라. 만족스러운 비즈니스도, 6년을 함께한 우정도 모두 거짓 안에 속한 것이니 잊어야 마땅하다. 들어내야 아프지 않다. 창 너머로 마차 바퀴 구르는 소리에 이따금 신경을 곤두세우며, 버석한 뺨을 물감 굳은 손으로 쓸어내린다. 몸을 웅크려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는다. 

나는 너를 잊을 셈이다. 사치스럽게 흐른 거짓된 시간들 속에 네가 날 어쩔 셈이었든, 내가 너를 아꼈든, 싫어졌든, 내가 떨어져나온 자리를 네가 무엇으로 느끼든. 살기 위해 이파리며 열매를 떨어트리는 가지처럼 점점 앙상해진다. 그러면 계절을 잘못 탄 것마냥 문득 춥고 외롭다. 성으로 달려가지도, 편지가 든 서랍을 열지도 못한 채로 스스로를 탓하며 겨울로 도망한다. 그러게, 거짓이 되어버릴 진실 따위는 처음부터 갖지 말았어야지. 영영 나의 따뜻한 계절을 잃을 줄 미리 알았더라면, 추락하고 박제되어 생동하지 못할 것들은 내 인생에 들이지 않았을 텐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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